금주의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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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WARDOUTWARD 묵상 – 배려의 계급성 2025.08.03 13:24:16

작성자박성중 조회수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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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의 계급성

 

배려는 도덕적으로 항상 옳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복지, 사회정책, 자선사업, 심지어 일상 속 친절까지 배려는 좋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로 반복해서 호명됩니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는 이 좋은 의도의 표면 아래 숨겨진 권력과 계급의 작동 방식을 집요하게 파헤칩니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La Distinction, 1979, 새물결, 1995)에서 개인의 취향, 언어, 감정 표현, 도덕적 습관이 모두 사회적 계급 구조 속에서 형성된 아비투스(habitus)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배려의 방식마저도 특정한 계층의 문화 자본을 전제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배려나 예의는 계층적으로 분포된 상징 자본이다. 그 미덕의 방식조차 계급적으로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공공의 배려를 실현하는 대표적 기구인 복지 행정은 누구를 어떻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규정하는가? 복지 수급자는 언제나 심사를 받고, 자격을 증명해야 하며,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야만 제도적 배려의 문턱을 넘을 수 있습니다. 이때 복지의 배려는 조건 없는 환대가 아니라, 상층 계급이 정한 규범과 자격에 따라 제공되는 통제된 호의일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공 배려는 단순히 선한 행위가 아니라 규율과 위계의 작동 방식일 수 있습니다. ‘배려받는 자는 항상 의심받고 검증되어야 하며, 때로는 스스로를 낮추는 방식으로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부르디외가 지적한 대로 배려조차 문화적 권력의 재생산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누가복음 1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누가복음 14:1314)

이 말씀은 상호적 보상을 기대하는 배려, 주고받는 친절이 아니라 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환대야말로 참된 공동체적 행위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는 배려의 자격 기준을 해체하며, 비자격자에게로 향하는 구조적 전환을 요청합니다.

 

부르디외가 말한 배려의 계급성과, 예수가 요청한 은혜의 비대칭성은 서로 다른 언어로 동일한 구조를 겨눕니다. 부르디외는 배려는 종종 지배의 기술이 된다고 말한다면, 예수는 진정한 배려는 갚음 없는 자리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복지제도, 행정, 종교, 지역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배려는 과연 누구의 자격과 규범 위에 세워져 있는가? 누구는 항상 배려의 주체로, 누구는 항상 수혜자로 고정된 것은 아닌가?

진정한 배려는 규율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것은 '도와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것도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초대에서 시작됩니다. 예수가 보여준 식탁은 그런 자리였습니다. 모든 계급이 해체되고, 배려의 위계가 무너지는 자리. 그 식탁에서만 인간다운 공동체는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