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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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INWARDOUTWARD 묵상 – 불안과 죽음 - Dietrich Bonhoeffer 2024.10.04 08:49:19

작성자박성중 조회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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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죽음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동시대인 중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평온함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예전처럼 죽음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죽음에서 좋은 점을 발견했고 거의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미 죽음에 속해 있음을, 그리고 매일매일 새로운 하루가 기적임을 느낍니다. 우리가 죽음을 환영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사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전염병처럼 피해야 할 사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너무 호기심이 많거나, 더 심각하게 말하면 우리는 여전히 부서진 삶의 조각에서 어떤 의미를 보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기에는 인생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위험 속에서 삶의 의미를 보려는 경향이 더욱 적습니다. 우리는 그럴 만큼 절박하지도 않고 삶이 제공하는 기쁨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불안과 장기간의 불안으로 인한 모든 혼란에 대해서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제 죽음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중에 겪은 모든 일 후에, 우리는 어떤 사소한 사고로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귀한 대의를 위해 헌신하면서 죽기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을 감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죽음이 될 수 있는 것,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죽음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하는 정신입니다.

 

- Dietrich Bonhoeffer, 감옥으로부터 온 편지와 글, 33-34.

 

 

INSECURITY AND DEATH

 

During recent years we have come to know death at close quarters. We are sometimes startled at the placidity with which we hear of the death of one of our contemporaries. We cannot hate death as we used to, for we have discovered some good in it after all, and have almost come to terms with it. Fundamentally we feel that we really belong to death already, and that every new day is a miracle. It would hardly be true to say that we welcome death-although we all know that accidie which should be avoided like the plague-we are too curious for that, or to put it more seriously, we still hope to see some sense in the broken fragments of our life. Nor do we try and romanticize death, for life is too precious for that. Still less are we inclined to see in danger the meaning of life-we are not desperate enough for that, and we know too much about the joys life has to offer. And we know too much about life's anxieties also, and all the havoc wrought by prolonged insecurity. We still love life, but I do not think that death can take us by surprise now. After all we have been through during the war we hardly dare admit our hope that we shall not die a sudden and unexpected death for some trivial accident, but rather in dedication to some noble cause. It is not the external circumstances, but the spirit in which we face it, that makes death what it can be, a death freely and voluntarily accepted.

 

-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pp.33-34.

 

 

실존주의는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숙명에서 의미를 발견하거나 또는 의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버스 덤블도어는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It is our choices, Harry, that show what we truly are, far more than our abilities.”(우리의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 정의된다.”라고 말합니다.

정의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죽음 앞 실존의 의미를 그의 선택에서 찾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는 의미도 최고의 가치를 위해 살고 죽을 것에 대한 요청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8 우리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서 14:7-8

 

 

written and translated by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