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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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WARDOUTWARD 묵상 – 공감 - Dietrich Bonhoeffer 2024.09.20 11:18:11

작성자박성중 조회수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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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리는 대부분 사람이 단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지혜를 배운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첫째로, 왜 그렇게 적은 사람이 미리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합니다.-그들은 항상 어떻게든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이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그들의 무감각함을 설명합니다. 공감은 재난이 다가올 것에 대한 두려움에 비례하여 자랍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윤리적 근거에 대한 많은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다. 누구도 운명을 정면으로 맞이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내면의 소명과 행위를 위한 힘은 단지 실제 위험에 직면했을 때만 획득됩니다. 누구도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의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우주의 심판자로 내세우고 원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의 상상력, 감수성, 그리고 정신적 민첩성의 부족은 꾸준한 평정심,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 그리고 고통에 대한 엄청난 수용력으로 균형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이러한 감경 상황 중 어느 것도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진정한 공감의 폭이 부재함을 벌충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때가 올 때까지 고난을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자 그는 자유인으로서 두 손으로 고난을 붙잡고 다스리셨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우리 인간의 고난을 마치 자신의 몸인 것처럼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셨고, 엄청난 생각으로 그것들에 기꺼이 복종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행동이나 고통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짐을 스스로 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의 손에 들린 도구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동정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한다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우리의 “시간”을 파악하고, 자유인처럼 위험에 직면하고, 두려움이 아닌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완하고 해방함으로 진정한 공감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의 공감의 넓이를 어느 정도 보여야 합니다. 도움의 손길을 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은 가장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고난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그의 형제들의 고통은 그의 적극적인 공감을 일깨우기에 충분합니다.


- Dietrich Bonhoeffer, 『감옥으로부터 온 편지와 글』, 29-31쪽.



SYMPATHY


We must never forget that most men only learn wisdom by personal experience. This explains, first, why so few people are capable of taking precautions in advance-they always think they will be able somehow or other to circumvent the danger. Secondly, it explains their insensibility to the sufferings of others. Sympathy grows in proportion to the fear of approaching disaster. There is a good deal of excuse on ethical grounds for this attitude. Nobody wants to meet fate head-on: inward calling and strength for action are only acquired in face of actual danger. Nobody is responsible for all the suffering and injustice in the world, and nobody wants to set himself up as the judge of the universe. Psychologically, our lack of imagination, sensitivity and mental agility is balanced by a steady composure, an unruffled power of concentration and an immense capacity for suffering. But from a Christian point of view, none of these mitigating circumstances can atone for the absence of the most important factor, that is, a real breadth of sympathy. Christ avoided suffering until his hour had come, but when it did come he seized it with both hands as a free man and mastered it. Christ, as the Scriptures tell us, bore all our human sufferings in his own body as if they were his own-a tremendous thought-and submitted to them freely. Of course, we are not Christs, we do not have to redeem the world by any action or suffering of our own. There is no need for us to lay upon ourselves such an intolerable burden. We are not lords, but instruments in the hand of the Lord of history. Our capacity to sympathize with others in their sufferings is strictly limited. We are not Christs, but if we want to be Christians we must show something of Christ's breadth of sympathy by acting responsibly, by grasping our "hour," by facing danger like free men, by displaying a real sympathy which springs not from fear, but from the liberating and redeeming love of Christ for all who suffer. To look on without lifting a helping hand is most unChristian. The Christian does not have to wait until he suffers himself; the sufferings of his brethren for whom Christ died are enough to awaken his active sympathy.


-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pp.29-31



공감, sympathy의 어원은 syn, ‘함께(together)’와 pathos, ‘느낌(feeling)’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pothos’는 ‘고통’과도 관계있는 단어입니다. 어원적으로 ‘sympathyu’는 ‘(고통의) 느낌을 함께함’이란 뜻으로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공감의 어려움은 실존이 가진 한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칸트의 이해대로 우리는 물자체(독일어: Ding an sich, 영어: Thing-in-itself)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다 자주 습관적으로 공감한다고 말합니다. 공감은 애초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노력할 뿐이고 노력해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진짜 어려움은 착각입니다. 자신이 공감한다는 착각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했다고 생각하니 심각합니다. 이러한 착각의 근원에는 계급 의식과도 밀접합니다. 난 공감을 베푼다는 또는 베풀 수 있다는 계급 의식입니다.


예수의 의미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의 태어남부터 공감의 노력이며 삶이 죽음이 공감이라 신앙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이 사명이 있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공감하려 노력하기. 공감하여 예수와 같이 그 고통을 대신하기, 함께하기.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요청이고 다짐이어야 합니다.



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 야고보서 2:14-17



written and translated by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