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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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WARDOUTWARD 묵상 – 확실성으로의 돌파 - Dietrich Bonhoeffer 2024.03.03 11:48:20

작성자박성중 조회수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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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성으로의 돌파


고백을 통해 인간은 확실성으로 돌파합니다. 왜 그럴까? 형제에게보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종종 우리에게 더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죄가 없으십니다, 그분은 악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관이시며 모든 불순종의 적이십니다. 그러나 형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은밀한 죄의 어두운 밤을 알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형제에게 가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점을 자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고백함으로써 종종 자신을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오히려 우리 죄를 자신에게 고백하고 스스로 용서를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우리가 셀 수 없이 재발하는 이유와 그리스도인의 순종이 미약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자기 용서를 바탕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습니까? 자기 용서는 결코 죄와의 단절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심판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말씀 그 자체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 Dietrich Bonhoeffer, 『함께하는 삶』, 115~116쪽.



Breaking Through to Certainty


In confession a man breaks through to certainty. Why is it that it is often easier for us to confess our sins to God than to a brother? God is holy and sinless, He is a just judge of evil and the enemy of all disobedience. But a brother is sinful as we are. He knows from his own experience the dark night of secret sin. Why should we not find it easier to go to a brother than to the holy God? But if we do, we must ask ourselves whether we have not often been deceiving ourselves with our confession of sin to God, whether we have not rather been confessing our sins to ourselves and also granting ourselves absolution. And is not the reason perhaps for our countless relapses and the feebleness of our Christian obedience to be found precisely in the fact that we are living on self-forgiveness and not a real forgiveness? Self-forgiveness can never lead to a breach with sin; this can be accomplished only by the judging and pardoning Word of God itself.


- Dietrich Bonhoeffer, Life together, pp.115~116.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인용은 소설 『벌레 이야기』(이청준 저)를 원작으로한 영화 『밀양(Secret Sunshine)』(이창동 감독)의 주인공 이신애(전도연 분)의 대사입니다. 신애는 남편과 사별 후, 어린 아들과 함께 밀양에 오게 됩니다. 그러나 아들마저 유괴로 잃게 된 후 교회에 깊이 의지하게 됩니다. 이후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면회를 간 신애는 유괴범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 인용은 유괴범과의 대화 속에서 신애에게 일어난 종교적 정신적 충격입니다.


신학적으로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의 용서가 가진 공동체성의 회복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용서는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논의되어야 합니다. 자주 공동체가 회복되지 않은 용서는 자기합리화가 됩니다. 신의 용서가 아니라 신을 사용한 용서입니다.


예수는 제단에 제물을 그리는 행위보다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 이뤄질 때 용서가 화해가 이뤄질 수 있다고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이를 통해 진정한 용서가 이뤄진다는 믿음이 있다면 용기를 내어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용서를 통해 진정으로 공동체는 회복될 것입니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 마태복음 5:23~24



written and translated by park